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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면감천’을 좌우명 삼아
미래로 나아가는 ‘영원한 노장’

- 글 구선영 사진 왕규태
합리적 성품에 원만한 대인관계 지닌 인물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 보이는 (주)해광건설 이주현(80) 회장에게서 온화한 기품이 느껴진다.
이 회장은 평소 합리적인 성품에 원만한 대인관계를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여러 조직들이 그에게 수장 역할을 맡긴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그는 1983년 해광주택(현 해광건설의 전신)을 설립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지속하면서도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쳐 지역사회의 귀감이 되어 왔다.
“항상 노력하는 것 뿐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날마다 최선을 다하자는 좌우명을 실천해 왔어요. 그러기 위해서 지금도 끊임없이 메모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지요. 새해가 되면 1년의 계획을 세우고 아침이면 하루의 계획을 세워서 최선을 다해 실천합니다. 목표를 달성한 후에야 메모장에서 지우는 것이죠.”
“지난날을 돌아보니 참 열심히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이 회장의 눈동자에 80여년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있다.


사업도, 인생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성장 추구
이주현 회장은 1943년 전남 해남군 북일면 월성리에서 태어났다. 해남에서 북일초를 졸업한 이후 광주로 유학을 나와 광주사대부중과 광주사범학교를 다녔다. 자녀교육 열의가 각별한 부친으로 인해 비교적 좋은 여건에서 공부할 수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가세가 기울면서 착실하게 준비했던 대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광주사범을 졸업한 후 모교인 북일초에서 5년간 교편을 잡던 그는 결혼한 이듬해 교사생활을 청산하고 꿈에 그리던 대학(조선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경제학은 기업인으로서 그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만든 촉매제 역할을 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주택건설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자본금이 전혀 없었는데, 어렵게 마련한 약간의 돈으로 내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단독주택을 지어봤지요. 감사하게도 완공하기 전에 사겠다는 주문이 밀려들지 뭡니까. 거기서 번 돈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집을 지어나갔어요. 그렇게 지은 집이 무려 50채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83년, 그는 드디어 해광주택이라는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다. 1983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광주시 북구 중흥동에 해광맨션을 건설, 분양한 것이 본격적인 주택사업의 출발이었다. 이후 해광빌라, 해광파크맨션, 해광무지개아파트, 해광샹그릴라 등을 분양하면서 주택기업으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90년대 들어서는 빌딩, 상가, 도로보수, 교사신축 등 다양한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이 회장은 해광건설을 주택, 토목, 건축, 전기, 소방, 조경면허를 갖춘 종합건설사로 키웠으며 자회사로 (주)해광종합건설, (주)해광산업개발, (주)해광샹그릴라를 운영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흐르는 물처럼 사업을 해왔습니다. 강물은 결코 무리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아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목적지를 향해 부단히 흘러간다는 사실이지요.” 그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투자를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이 회장의 고집스러운 경영스타일이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철학을 내팽개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예순일곱에 박사 학위 받은 성실한 경제학도
이 회장은 사업을 하면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이 50이 되던 1990년 전남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뒤이어 연세대학교와 미국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최고 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예순일곱이 되던 2009년에는 조선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배움에는 왕도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열심히 무언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갈 수 있으니까요.” 서울대 최고 경영자과정을 다닐 때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오후 비행기로 상경해 수업이 끝나고 버스를 타면 새벽 4시가 되어 집에 도착하기를 수년간 반복하던 시절이다. 당시 우리협회 광주전남도회 회장직을 역임했는데 사업과 공부, 봉사활동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는 이 모든 역경을 ‘지성이면 감천’을 항상 가슴속에 새기며 이겨낸 것 같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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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배움을 이어온 이주현 회장은 2009년 조선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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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오연(五緣)에 최선 다해 봉사하기로 목표 세워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5가지 인연을 만난다고 합니다. 핏줄인 혈(血)연, 태어난 지(地)연, 배움의 학(學)연, 일터의 일사(事)연, 봉사의 즐거움을 뜻하는 낙(樂)연이 그것이죠. 저는 마흔 무렵, 이제까지 누린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오연에 최선을 다해 봉사하기로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 회장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오연과 고루 만나게 된다. 그는 사업을 시작한 이후 고향부터 찾았다. 1988년 해광장학회를 설립해 매년 고향 북일면 두륜중학교에 장학금을 지급했다. 면민의 날이면 효자효부에게 행운의 순금열쇠를 증정하고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열어드렸다. 재광 해남군 향우회장을 지내며 고향발전에도 앞장섰다. 해광장학회는 훗날 해광문화재단으로 발전해 장학사업과 문화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모교 사랑도 남다르다. 조선대학교에 장학기금을 기탁한 것은 물론 2014년~2018년 조선대학교 총동창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재)조선대학교총동창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조선대학교 경상대학에 가면 ‘해광 이주현관’이란 강당이 개관되어 있을 정도로 그는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존경받고 있다. 업계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이 회장은 우리협회 광주전남도회 창립초기부터 부회장으로 재직했으며 제2대 도회장을 역임했다. 2014년~2015년에는 대한건설협회 광주시회장과 광주전남건설단체연합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재)빛고을 주택문화진흥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역사회에서의 활약도 컸다. 1997년~1998년 세계적인 봉사단체인 국제라이온스협회의 355-B1지구 총재를 지냈으며 광주광역시 핸드볼협회장,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 광주전남지부 이사장, 광주방송(KBC) 이사 및 감사, 광주상공회의소 상공위원, 법무부 법사랑위원 광주지역연합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화·체육·예술증진은 물론 인권옹호와 범죄예방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에 오랫동안 전념했다.
사업을 하면서 이 많은 역할을 어떻게 해냈을까 싶을 정도로 이 회장이 보낸 세월은 역동적이다.
“저는 지금도 꿈을 꾸고 계획을 세웁니다. 앞으로 해광문화재단을 더 키우고 싶어요. 소외된 이웃과 어려운 학생들, 젊은 예술인들에게 지속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지금의 목표입니다.”
80세의 나이를 잊게 만드는 이주현 회장, 그는 ‘사업경영’을 넘어 ‘인생경영’에 성공한 CEO로 기억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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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예방활동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청소년 선도대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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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범죄예방위원 광주지역협의회장으로 활동했다.